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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문화재 기념물


선생의 묘소는 본래 원형봉토분으로 본시 곡담에 있었으며 곡담은 전으로 쌓았던 것이나 수 백년 내려오면서 허물어지고 다시 쌓고 하는 동안 전은 곡담 양쪽 머리에만 몇개 남았다. 묘전석은 본래 장대석 기단과 상성 2개, 묘표 1좌와 문관석 2기 만이 있었던 단촐한 분묘였으나 1972년 경기도 문화재 기념물 제 1호로 지정되면서 동년 12월에는 상석을 교체하였고 1974년도 12월에는 곡담 35m를 보수한 것을 비롯하여 문중 자력으로 봉분에 병풍석과 난간석을 돌렸으며 문인석, 양마석, 장명 등까지 신조하였다. 또 1980년에는 대대적인 정화사업을 실시하여 묘역을 수축하고 재실경역에 있는 민가 3채를 이전하였고 입구에 신도비각을 건립하면서 3백여평에 이르는 주차장까지 마련하였다.

문화재는 현상을 변경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이 있으면서도 문화재로 지정한 이후 전에 없던 석물을 설치하는 등으로 원형을 훼손토록한 것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선생의 묘에 남아있는 본래의 것은 문관석 2기와 묘 좌측에 서있는 묘표 뿐이다. 묘표는 높이 153cm, 너비 61cm, 두께 17cm 의 크기로 규석 계통의 재질이며 비수(碑首)에는 유운문(流雲文)을 양각한 가첨석을 얹었는데 비양(碑陽)에는 <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 새겼고 음기<陰記>에는 < "정덕 12년(중종 12, 1517) 태학생 등이 상감께 아뢰기를 문충공 정몽주는 충효의 대절이 있고 이학에 있어서는 동방의 조(祖)이며 사문에 끼친 공이 크므로 문묘에 배향할 것을 상언하자 상에서 윤허하셨기로 그해 9월 17일 문묘 서무의 문창후 최지원 선생의 다음에 배향하였다. 또 분묘를 수축하고 표석을 세우는 것은 나무를 베고 가축을 기르는 것을 금하고자 하는 것이다. 벼슬은 고려의 직함으로 쓰고 문충공이라 쓰지 않음은 대개 공께서 두성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하기 위함이다. 평생에 공의 행적은 고려 열전에 전한다"> 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선생이 순절한 뒤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천묘코자 할 때, 면례(緬禮) 행여가 수지읍 풍덕천 지경에 이르자 앞에 세웠던 명정(命旌)이 바람에 날려서 지금의 묘소 위치에 떨어 졌는데 고향으로 운구하려하면 행여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명정이 날려 내려앉은 곳에 장사를 모셨다는 전설이 있다.

- 용인문화원 발행 /이인영(李仁寧)著 /<내고장 용인 문화유산총람> 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