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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기념물 제 104호 -오윤겸(吳允謙) 묘
  향토유적 제 12호 - 오명항(吳命恒) 묘
  용인시 모현면 오산리 산 5번지 소재


오윤겸(吳允謙) 묘 조선 문신. 자는 여익(汝益). 호는 추탄(秋灘). 토당(土塘). 본관은 해주. 선공감역(繕工監役) 희문(希文)의 아들. 명종 14년 (1559) 10월 12일 출생. 그의 모친의 꿈에 용이 하늘로 오르는 것을 보았으므로 초명을 성룡(星龍)이라 하였다.

15세 때인 선조6년 (1573). 외삼촌을 따라 용인에 내려와서 시전(詩典)을 읽었으며 25세 때 우계(성혼)의 문하에서 수업, 선조15년(1582) 사마시에 합격한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철의 종사관으로 발탁되었으며 1617년 회답겸 쇄환정사가 되어 일본에 잡혀갔던 150여명의 포로를 데리고 돌아 왔고 하극사(賀極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인조 2년 (1624). 이괄의 난 때에는 왕을 공주로 호종하였고 정묘호란 후에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오르니 그의 나이 70세였다. 한 때 돈령부사로 물러났다가 1633년 다시 좌의정에 오르고 기로소에 들었으며 78세때인 1636년 인열황후 총호사(摠護使)로 과로한 나머지 득병하여 1636년 정월 19일 밤 신시에 운명하여 용인에 장사하니 지금의 오산리 서편이다.

그가 와석하자 인조는 하루에 세번씩 환관을 보내어 문병하였으니 이 또한 전례에 볼 수 없는 일이라 하였다. 선생이 유언하기를 "나는 거룩한 임금을 만났으나 세상을 바른 길로 이끌지 못했으며 몸에는 덕이 없고 나라에 대하여서는 공로가 없으니 무덤에 세우는 비석이나 청시(請諡)에 있어 분수에 지나치게 찬양하는 일은 하지 말고 치상을 검박하게 하라"고 하였다 .

이때 나무 가지에서 까치가 울었다. 그러자 선생은 시 한 수를 받아쓰게 하였다. '뜰에 있는 나무 가지에 까치가 울어/소리가 벼개맡에 이르니 내 마음 슲어지네 / 작은 정성 아침 경연에 다하려 했건만 / 오늘 저녁 영 이별함이 괴롭구나' 하여 임금을 향한 마음이 이처럼 돈돈하였음을 느끼게 한다.

그의 분묘에는 운명 직전의 유언에 따라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으며 묘표를 세웠는데 묘표의 음기는 김상헌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이 썼으며 1647년에 세웠다.

본래는 호석이 없는 봉토분이였으나 지금의 것은 근년에 후손들이 설치한 것이다. 양(兩) 분묘 앞에 상석이 있으며 전면에 향안석이 있다. 상석을 중심으로 동자석이 섰고 매우 작은 규모의 망두석(촛대석) 한쌍이 좌우에 있다. 그 밖으로 문인석이 있으며 우측의 분묘 앞에 비갈이 있다. 비갈의 몸돌은 규석질의 돌이며 농대는 화강암인데 상면에는 구갑문을 두었고 측면에는 동자주를 세우고 유운문을 두었다. 비교적 넓은 묘역을 점하고 있으나 정승을 지낸 재상의 분묘 치고는 매우 간결한 모양을 보이고 있다.

오명항(吳命恒) 묘

오명항(1673-1728)은 조선 숙종-영조 때의 문신으로, 자는 사상(士象), 호는 모암(慕菴)·영모당(永慕堂),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성장한 그는 어릴 때부터 문무(文武)에 재량이 뛰어났다. 숙종 31년(172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뒤 이어 여러 관직을 거쳐 승지(承旨)를 지냈다. 영조 3년(17 05) 정미환국(丁未還局)으로 소론이 등용될 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기용되고, 이조·병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죽산(竹山)에서 난을 토평, 분무공신(奮武攻臣) 1등이 되고, 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로 인해 영조의 신임을 받았다. 오명항은 효성이 지극 하여 고향에 효자정문(孝子旌門)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오명항(吳命恒) 묘는 해주오씨 시조단(始祖壇) 뒷산에 위치한다. 구릉의 정상부에 자리잡은 묘역은 1백여평에 이른다. 능선의 지세를 따라 서남간으로 자리잡은 묘에는 일반 사대부가(士大夫家)의 묘에서는 흔히 볼수 없는 격식이 나타난다.

제절 앞 좌측에 서 있는 묘비의 규모도 관래의 묘비중에서는 볼 수 없는 가장 큰 규모로 가첨석의 크기는 가로 164, 세로 128, 높이 55cm 에 이른다. 대형 판석(板石) 위에 놓인 농대(비대석)는 동자주(童子柱),연판문 등의 조식이 생략되어 있으나 상변을 모접이 하였고 크기는 가로 155, 세로 78cm이다.

비의 측면에는 <숭정기원 후 3계축 월 일 입(立)>이라는 간지가 있다. 이 시기는 정조17년(1793)이므로 영조4년 9월 9일 선생이 별세한 때로 부터 65년 후의 것으로 판단된다. 비의 음기(陰記)는 영의정을 지낸바 있는 지돈령(知敦寧) 이종성(李宗誠)이 짓고 글은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송하옹(松下翁) 조윤형(趙允亨)이 쓴 것으로 영조시대의 석학, 문장들의 글과 필적이다.

묘의 분구(墳丘)와 제절의 접합선에 9개의 장대석으로 기단부를 두고 기단석을 선으로 하여 봉분 앞에 혼유석과 상석을 정렬하였다. 상석은 화강암(애석) 재(材)로 크기는 151.5 x 106.5 x 47cm 이다. 상석을 받치고 있는 하반석은 상석의 크기와 같은 일매석으로 그 높이는 47cm 이다. 상석을 중심으로 좌우에 홀을 든 동자석(童子石)을 세웠고 상석 앞쪽 중앙에 세운 장명등은 기단부, 상대석, 옥개석으로 구분되고 유운, 안상 등의 문양을 두었고 반구형 우동(隅棟)의 옥개 위에는 보륜과 보조를 얹었다. 또 장명등 보다 조금 안쪽에 세운 망주석은 각주형(角柱形)이며 보륜 받침에는 괴운문을 조식하였다.

분묘의 바깥쪽에 마주세운 장군석(將軍石:무석(武石 또는 무인석)은 높이 230cm, 폭 67cm, 두께 61cm 에 이르는 거구의 석상으로 능원(陵院)의 무인석 보다 1척 정도가 작은 것 이기는 하나 용인 관내에서는 유일한 분묘의 예이다.

이 분묘는 영조 즉위 초 혼란을 막고 사직의 기반을 튼튼하게 다진 일등공신(분무공신)을 예장(禮葬)한 장제격식이 원형대로 남아았는 18세기 초의 분묘로서 공신에 대한 묘제의 사례연구에 있어 주목되는 바가 적지않다.

※ 해주 오씨 (海州吳氏) 에 관하여

【시조】 오인유[吳仁裕]

【본관 및 시조의 유래】

해주(海州)는 황해도 남해안 중앙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 때 내미홀이라 하였고, 신라 경덕왕이 폭지로 고쳤으며, 고려 태조가 본군의 남쪽이 대해(大海)에 임하고 있다고 하여 해주로 개명하였다. 해주오씨(海州吳氏)의 시조 오인유(吳仁裕)는 본래 중국 송나라 때 이름 높았던 대학사로, 984년 고려에 들어와 검교군기감을 역임하였고 황해도 해주에 정착하여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해주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고려조의 인물로는 1107년에 윤관과 함께 여진족을 토벌하여 용맹을 떨쳤던 명장 연총(延寵)이 이부상서를 거쳐 문하시중 평장사에 올랐으며,찬성사에 이른 한경(漢卿), 그리고 광정(光廷)이 공조전서를 역임하여 가문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조선에는 선공감역 희문(希文)의 아들인 윤겸(允謙)은 관찰사와 좌부승지를 지내고 인조반정후 노서(老西)의 영수가 되어 대사헌, 이조판서를 지낸 뒤 우위정과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의 조카 달제(達濟)는 병자척화삼학사의 한 사람으로 병자호란 때 청과의 화의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심양으로 이송되어 윤집, 홍익한과 함께 살해되었으며,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문장이 뛰어났던 윤겸의 손자 도일(道一)은 숙종 때 도승지와 대사헌을 거쳐 대제학에 오르고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현손 명항(命恒)은 병조판서를 역임한 후 분무일등공신에 올라 해은 부원군에 봉해졌고 우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형조판서를 지낸 두인(斗寅)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들이 나왔는데, 그의 아들 태주(太周)가 현종의 부마(駙馬)로서 해창위에 봉해졌고, 문명이 높았던 손자 원(瑗)은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특히 영조에게 학문과 덕을 닦는 요령을 진언하였고 옳다고 믿은 일은 직언을 잘 하기로 유명하였다. 원(瑗)의 아들 재순(載純)도 학문으로 당대에 뛰어났고 양관대제학을 역임하여 부자 대제학으로 이름이 났다. 근대인물로는 조선말 개화의 선각자 금석학(金石學)과 서예(書藝)에 일가를 이룬경석(慶錫)과,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중의 한 사람이었던 그의 아들 세창(世昌)이 독립운동가로 크게 활약하여 가문을 더욱 빛낸 자랑스런 인물들이다.

【 집성촌 】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 학일리, 죽능리 / 전북 정읍군 정우면 대치리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덕봉리 / 경남 거창군 마리면 고학리
충남 금산군 추부면 일원 / 황해도 벽성군 가좌면 매곡리
전북 순창군 쌍치면 용전리 / 황해도 벽성군 월록면 상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