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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기(燈器)가 언제부터 인간의 생활에 쓰였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선사시대 주거공간에서 볼 수 있는 중앙 노(爐)가 처음에는 취사와 난방의 기능과 함께 어둠을 밝혀주는 조명의 역할을 겸하였으리라 추정된다. 인간의 지혜가 발달하면서 중앙 노는 취사와 난방, 조명으로 그 역할이 점차 분화되어 갔으며, 그 가운데 조명 방식은 들짐승의 기름이나 식물성 기름을 채취하여 석기나 토기 그릇에 담아 불을 밝힌 것이 등잔의 시초가 될 것이다.

불의 이용에 대한 이야기가 전 세계적으로 퍼져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대체로 신(神)이나 수인(燧人)이 사람에게 불을 전해준 것으로 이야기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생쥐가 사람들에게 불의 이용법을 전해주었다고도 한다. 즉 부시와 부싯돌을 이용한 방법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중국의 고전(古典)에서는 서왕모(西王母)가 황제(黃帝)에게 구화등경(九華燈경)을 주었다는 이야기와 황제가 하도(河圖)를 읽기 위해 나무 열매의 기름을 짜서 면(綿)심지를 만들어 불을 밝혔다는 이야기, 그리고 요(堯) 임금이 등경(燈경)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등이다.

고조선의 경우 등잔과 관련하여 아직까지 구체적인 자료가 없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낙랑의 유적에서는 청동제의 촛대와 고배형 등(燈), 토제의 칠지등(七支燈)이 발견된 바 있다. 그리고 고구려 쌍영총의 고분 벽화에 낙랑 유적의 고배형 등과 매우 유사한 것이 그려져 있어 흥미를 끈다. 또한 신라 금령총(金鈴塚)에서 낙랑의 칠지등보다 다소 진전된 형태의 다등식(多燈式)등잔이 출토되어 당시의 등기 양식을 살펴보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낙랑과 한대(漢代)의 출토품인 다지(多支)및 칠지등은 여러 개의 등잔이 나뭇가지 형태 위에 얹혀져 각기 독립된 형태를 유지하지만, 신라의 다등식(多燈式)등은 4-6개의 등잔이 하나의 둥근 원통관에 연결되어 기름을 부으면 여러 개의 등잔이 일정한 유량(油量)을 유지하면서 불을 밝힐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그밖에도 신라와 가야 지방의 고분에서는 오리형 토기, 기마형(騎馬形)토기, 용형(瑞獸形)토기, 수레바퀴장식 토기등과 같은 이형토기(異形土器)들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이러한 이형토기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견해가 분분하나 등기로 보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이 시기에 이러한 토기들이 다수 출토되는 것은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한다고 볼 때 실용적인 생활용기보다는 제정일치 시대의 주요 신격에 대한 의식 용기로서 나무(神木), 오리(솟대), 용, 말 등과 같은 형태의 토기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형토기는 모두가 한결같이 꼬리부분 쪽에 구멍(開口)이 나있어 등잔으로 쓰였다면 이곳에 심지를 내어 불을 붙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촛불은 삼국시대에 사용된 기록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당의 문화와 함께 당이 계승한 남북조 문화를 받아들여 불교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이 시대의 등기는 불교문화의 틀 속에서 살펴볼 수 있으며, 그 어느 시대보다 조형미가 뛰어나다. 통일신라시대의 금동감옥촛대(金銅嵌玉燭臺 :국보 제174호)와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당초(唐草)무늬의 금동초가위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는데, 금동감옥촛대는 여섯 개의 수면(獸面) 다리에 여섯 꽃잎의 상·하반을 가진 장중하고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금동초가위 역시 화려한 당초무늬에 점문(點紋)을 찍었으며, 초를 자를 때 초가 부서지지 않도록 반원형의 받침을 달아 세련된 조형 감각과 탁월한 공예기법이 두드러진다. 이를 통해 통일신라의 화려했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초는 매우 귀중하게 취급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일부 귀족층을 위한 의례용 수요에 그치고, 사용된 촛대 양식 또한 광명대(光明臺)와 같이 귀족적이고 장엄한 형태가 나타난다. 촛대는 주로 청동으로 많이 제작되었으며, 등.촉 겸용의 촛대도 있다. 전반적인 형태는 등·촉 겸용의 경우 초받침이 원반형이며, 초꽂이는 이후 조선시대의 양식에 비해 길고 크다. 기둥(竿柱)은 죽절형과 염주형 그리고 신라시대의 영향을 받은 고복형(鼓腹形)이 있으며, 밑받침은 신라시대의 고배각 형태에서 사발을 엎어놓은 듯한 복발형(覆鉢形) 받침으로 바뀌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의 찬란했던 불교문화 속에서 만들어진 촛대와 제등 같은 의식용 등기가 퇴보하고, 조선 특유의 간편하고 실용적인 등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한편, 초의 소비가 늘어나게 됨에 따라 초의 이용 방법이 여러 가지로 강구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초의 수요에 대해 공급이 미치지 못하여, 세종은 초의 사용을 금하고 기름등잔(油燈)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밀초를 사용하므로 밀봉(蜜蜂)의 절종(絶種)을 염려한 세종이 초의 사용을 엄금한 것이다. 밀초 외에 소기름이나 돼지기름으로 만든 돈지초(豚脂燭), 우지초(牛脂燭)가 생산되기도 하였으나, 질이 좋지 않아 널리 사용되지는 못하였다. 일반 서민의 밀초 사용은 관청의 엄격한 통제를 받았으며, 밀초의 사적 매매가 금지되고 관혼상제(冠婚喪祭)때에 관청에서 배급받아 사용하게 하였다.

조선중기에서 조선후기에 이르면 초의 공급이 나아지고, 주택양식의 세련과 함께 촛대의 의장도 매우 화려하게 변모된다. 고려시대 이래로 계승된 촛대의 양식은 주로 의·제식용에 머물고, 일반 가정용 생활 촛대는 불후리(火扇)를 달고 은입사(銀入絲)의 길상문(吉祥紋)을 장식한 화려한 형태의 촛대가 만들어졌다. 초 자체가 귀한 만큼 의장이 세련되고 가격 또한 비싸진 것이다. 이는 초의 주 소비층이 조선사회의 상류양반 계층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